Chong Seok Jeong 총석정
조선향토대백과 한상익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출생하였다. 19살에 함흥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구에 내려가 사범학교 강습과 1년을 다니고 겨울방학기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동경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였으나 군사훈련시간 자기를 모욕한 일본륙군 대좌를 구타한 것으로 체포령이 내려 밀선으로 귀국하였다.
28살 되던 해에 서울에서 광복을 맞은 그는 그해 11월에 고향인 함흥으로 왔으며 조선미술가동맹
함경남도 현역미술가로 첫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후 1950년 4월부터 5년 동안 평양미술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5년말부터 조선미술가동맹 함경남도, 강원도위원회에서 1971년까지 현역미술가로 창작생활을 하였다. 1971년부터 창작실천상
나타난 엄중한 과오로 하여 14년간 통천군 고지수산사업소와 고산군 광명공예품공장에서 일하면서 창작생활을
하였다.
1984년부터 강원도 미술창작사 현역미술가로 있으면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창작활동을 하였다. 한상익의
창작활동은 1943년 일본에서 귀국한 때부터 시작되였는데 유화 ‘부엌에서’, ‘추의작’은 1944년에 열렸던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다.
특히 전람회에서 특선을 받은 ‘추의작’으로 하여 출세의 길을 걷게 되였다. 그는 유화에서
독자적인 색채기법련마에 공력을 들였으며, 그의 창작활동은 광복후 조국에 돌아와 더욱 왕성하게 진행되였다. 광복의 기쁨 속에 마음껏 쇠물을 뽑는 강철로동자들의 모습을 담기 위해 성진제강소에 나간 그는 불과 3개월만에 유화 ‘단강도’를 창작하고 련이어 대풍작을 마련한 기쁨에 잠겨있는 고향사람들 속에 들어가 단 며칠동안에
‘수확전날’을 완성하였다.
유화 ‘풍년송’도 고향마을에서 창작하였다. 이 3점의
유화들은 제1차 국가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모두 입선되였고 그중에서 유화 ‘단강도’는 문화예술상 2등으로 평가되였고 김일성주석의 표창장을 받았다. 그의 창작생활에서의
전성기는 평양미술대학에서 교편을 잡던 시기였다. 이 기간 그는 유화 ‘임무를 띄고’, ‘피로써 맺어진 우의’, ‘고지의 이야기’, ‘새 땅에 씨를 뿌리고’, ‘항구도시 원산’ 등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중 유화 ‘고지의 이야기’는 문학예술상
1등으로 당선되였고 ‘새 땅에 씨를 뿌리고’는 국가미술전람회와 전 유럽사회주의나라들과 중국에서 진행된 순회전람회, 제1차 사회주의국가조형미술전람회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후 교단을 내려 함경남도와 강원도에서 현역미술가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금강산과 원산의
명승지들을 편답하면서 ‘백두산’, ‘국화’, ‘만물상’, ‘구룡각’, ‘봄날의 온정리’, ‘왕찔레꽃’, ‘선하계의 가을’, ‘금강산념주담’, ‘삼일포’, ‘옥류동의 가을’, ‘총석정’, ‘비봉폭포’ 등 근 200점에 달하는 작품을 창작하였다. 이 작품들에는 유화를 조선화기법으로 창작하여 우리 식의 유화를 창조하려는 그의 시도가 용해되여 있다. 그의 미술창작의 총화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92년 평양에서
개인미술전람회를 가졌다. 한상익은 미술가로써 창작활동에서 뚜렷한 목표와 지향을 안고 살았을 뿐만 아니라
개인생활에서도 독특한 성격이 있어 53세에야 결혼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상익 [韓相益] (조선향토대백과, 2008., 평화문제연구소)
원문주소 :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58052&docId=2857299&categoryId=58080
총석정 (40cm x 28.5cm) 한상익 캔버스에 유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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