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ng Seok Jeong 총석정

 조선향토대백과 한상익

남한과 북한이 공동으로 편찬한 백과사전이 있습니다. [조선향토대백과]로 불리는 이 책은 2006년에 발간 되었는데 북한의 자연,인문,지리정보를 방대하게 담고 있으며 네이버 및 국가지식포털에서 쉽게 검색해서 열람할 수 있습니다. 저번에 소개한 북한의 조선력대미술가편람은 온전히 북한의 관점에서 서술한 책이다 보니 다소 읽기 어색한 표현들이 많은 반면에 이 공동 편찬물은 남한사람이 보면 남한 책이고 북한사람이 보면 북한 책일 수도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단 조선향토대백과의 한상익 부분을 발췌해 보겠습니다.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출생하였다. 19살에 함흥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구에 내려가 사범학교 강습과 1년을 다니고 겨울방학기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동경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였으나 군사훈련시간 자기를 모욕한 일본륙군 대좌를 구타한 것으로 체포령이 내려 밀선으로 귀국하였다.
28
살 되던 해에 서울에서 광복을 맞은 그는 그해 11월에 고향인 함흥으로 왔으며 조선미술가동맹 함경남도 현역미술가로 첫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후 1950 4월부터 5년 동안 평양미술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5년말부터 조선미술가동맹 함경남도, 강원도위원회에서 1971년까지 현역미술가로 창작생활을 하였다. 1971년부터 창작실천상 나타난 엄중한 과오로 하여 14년간 통천군 고지수산사업소와 고산군 광명공예품공장에서 일하면서 창작생활을 하였다.
1984
년부터 강원도 미술창작사 현역미술가로 있으면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창작활동을 하였다. 한상익의 창작활동은 1943년 일본에서 귀국한 때부터 시작되였는데 유화 ‘부엌에서’‘추의작’은 1944년에 열렸던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다.
특히 전람회에서 특선을 받은 ‘추의작’으로 하여 출세의 길을 걷게 되였다. 그는 유화에서 독자적인 색채기법련마에 공력을 들였으며, 그의 창작활동은 광복후 조국에 돌아와 더욱 왕성하게 진행되였다. 광복의 기쁨 속에 마음껏 쇠물을 뽑는 강철로동자들의 모습을 담기 위해 성진제강소에 나간 그는 불과 3개월만에 유화 ‘단강도’를 창작하고 련이어 대풍작을 마련한 기쁨에 잠겨있는 고향사람들 속에 들어가 단 며칠동안에 ‘수확전날’을 완성하였다.
유화 ‘풍년송’도 고향마을에서 창작하였다. 3점의 유화들은 제1차 국가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모두 입선되였고 그중에서 유화 ‘단강도’는 문화예술상 2등으로 평가되였고 김일성주석의 표창장을 받았다. 그의 창작생활에서의 전성기는 평양미술대학에서 교편을 잡던 시기였다. 이 기간 그는 유화 ‘임무를 띄고’‘피로써 맺어진 우의’‘고지의 이야기’‘새 땅에 씨를 뿌리고’‘항구도시 원산’ 등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중 유화 ‘고지의 이야기’는 문학예술상 1등으로 당선되였고 ‘새 땅에 씨를 뿌리고’는 국가미술전람회와 전 유럽사회주의나라들과 중국에서 진행된 순회전람회, 1차 사회주의국가조형미술전람회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후 교단을 내려 함경남도와 강원도에서 현역미술가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금강산과 원산의 명승지들을 편답하면서 ‘백두산’‘국화’‘만물상’‘구룡각’‘봄날의 온정리’‘왕찔레꽃’‘선하계의 가을’‘금강산념주담’‘삼일포’‘옥류동의 가을’‘총석정’‘비봉폭포’ 등 근 200점에 달하는 작품을 창작하였다. 이 작품들에는 유화를 조선화기법으로 창작하여 우리 식의 유화를 창조하려는 그의 시도가 용해되여 있다. 그의 미술창작의 총화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92년 평양에서 개인미술전람회를 가졌다. 한상익은 미술가로써 창작활동에서 뚜렷한 목표와 지향을 안고 살았을 뿐만 아니라 개인생활에서도 독특한 성격이 있어 53세에야 결혼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상익 [韓相益] (조선향토대백과, 2008., 평화문제연구소)

원문주소 :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58052&docId=2857299&categoryId=58080

 



[조선향토대백과]형식이 백과사전이므로 북한의 미술사 [조선력대미술가편람]과 비교해보면 기본적으로 감상적인 부분은 생략되고 객관적인 이력 위주로 요약해 표현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서로 간에 민감한 부분은 공동 작업 중에 내용 자체가 아예 생략되거나 축소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1971년 한상익이 지방으로 좌천된 사건은 양쪽 공통적으로 간략하고 점잖게 표현되어 있는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하루 아침에 신분이 바뀌는 엄청난 시련의 처벌이었다고도 합니다. 향후 김일성주석에 의해 복권이 되기 때문에 북한에서도 심한 처벌로 기록하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1991년 김일성 주석이 <백두산> <국화> 작품에 대하여 우리식의 유화를 언급하며 칭찬의 교시를 내리고 한상익을 늘그막에 크게 복권 시키게 된 내용은 조선력대미술가편람에서는 감동적인 미사어구로 상세히 표현되어 있는 반면, 위의 조선향토대백과에서는 우리식의 유화를 언급한 것으로 간단히 마무리됩니다. 이 부분은 남한 쪽 입장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분석은 순전히 개인적인 추측이며 남과 북이 같은 한 민족으로서 인식과 표현의 차이를 좁히며 동질성을 갖는다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총석정 (40cm x 28.5cm) 한상익 캔버스에 유채

이번에 올리는 작품의 제목은 [총석정] 입니다.
 한상익이 총석정을 주제로 그린 여러 작품에서 솟아오른 기암괴석과 그 위의 나무, 아래쪽으로 부서지는 하얀 파도, 그리고 돗단배는 주로 공통적으로 보이는 소재입니다. 그렇지만 작품마다 그려진 날씨에 따라 해가 구름에 가려져 있거나 쨍쨍하게 바다에 반사되거나 해서 같은 배경이지만 다른 느낌을 갖게 됩니다.  빛의 변화에 따른 총석정의 다양한 모습은 한상익이 자연스럽게 인상주의적 표현을 할수 있었던 좋은 소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바람에 날리는 나무 가지가 빛으로 부서지는 표현이 너무나 좋습니다. 반쯤 가려진 태양빛은 바다 위에 은은히 반사되고 듬성듬성 세로줄로 그려진 주상절리의 기암괴석은 단면마다 색감에서 미묘한 빛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일반적인 다른 총석정 작품에 비해 크기는 작은 편인 반면 밀도 있게 그려져 있어 큰 작품 못 지 않은 디테일과 완성도가 느껴지고 보면 볼수록 작지만 정성을 들인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묶음 판매되던 여러 장의 한상익 그림들 중에서 선별한 한 장의 그림입니다. 당시에는 처음 알게 된 판매자였고 그림 간에 편차가 심해 구입을 포기하려 했지만 유달리 수작으로 느껴지는 이 그림이 마음에 걸려서 양해를 구하고 낱개로 구입하였습니다.
컬렉팅 한 작품들은 저마다 각각의 소중한 만남의 기억들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그 중에서 선택이라는 특별한 인연으로 기억에 남아 오늘도 제게 은은하게 눈부신 바다를 감상하는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총석정 (40cm x 28.5cm) 한상익 캔버스에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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