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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rt 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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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기교를 가진 화가 한상익  북한에서 무소속으로 발행되는 「 통일신보 」라는 주간신문이 있다고 합니다 . 주로 북한 당국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데 2014 년에 ‘ 독특한 기교를 가진 화가 ’ 라는 제목으로 한상익에 대한 기사가 올라옵니다 . 북한 당국에서 화가 한상익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 내용이 궁금합니다만 제게는 ( 남한사람 ) 해당 영역으로 인터넷 접근이 차단되어 있어 통일신보 기사를 열람할 수가 없습니다 . 다만 당시에 남한의 인터넷 신문 ‘ 통일뉴스 ’ 에서 북한의 ‘ 통일신보 ’ 의 기사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가 있어 그 소개 기사로 북한 통일신보 기사의 내용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 2014 년 12 월 29 일자 통일뉴스의 기사를 올려봅니다 . ( 민족간 전투가 묘사된 내용 몇 줄은 중략으로 처리했습니다 . 남과 북의 여러 자료들을 미술사적인 순수한 호기심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같은 민족 사람으로서 느끼기에 민망하고 적대적인 내용들이 곳곳에 보이는 건 다시 한번 느끼지만 참으로 부정하고픈 슬픈 현실입니다 .)     월북 유화 작가 한상익 '독특한 기교를 가진 화가' <통일신보> 한상익 . 북한의 대표적인 유화 작가로 알려진 그는 누구인가 . 북한 무소속 대변지 주간 < 통일신보 > 가 27 일 대표적인 월북 유화 작가인 한상익을 조명했다 . 1917 년 9 월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태어난 한상익은 19 살이 되던 해 함흥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 졸업 후 대구사범학교 강습과에 재학 중이던 한상익은 겨울방학 동안 일본으로 건너갔다 . 도쿄미술학교 유화과 유학 당시 그는 도서관에서 서유럽 중세미술작품과 동양미술전시관에 전시된 중세미술작품들을 연...

Songdowon 송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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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익, 한국일보 기사에서(1997년) 1997 년 한국일보에 올라온 한상익에 관한 기사를 소개합니다 . 예술분야의 사설기사인 만큼 편향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잘 요약 되어 있어 한상익을 모르는 분들께 처음 알리는데 제가 주로 많이 사용하는 글입니다 .   ◎한상익 삶과 예술 / 일제때 동경유학 엘리트 미술가 / 한때 반동 몰려 벽돌공 시련도 / 북 절경·도시풍경 묘사 탁월 한상익 화백은 광복이후 북한화단을 지켜온 산증인이며 사회주의리얼리즘과 인상파기법을 결합해 새로운 화풍을 개척 , 북에서 첫 손가락으로 꼽는 서양화가이다 . 1917 년 함남 함주군 주서리에서 태어난 한씨는 함흥고보를 거쳐 37 년 미술학도의 꿈이었던 도쿄 ( 동경 ) 미술학교에 입학함으로써 「엘리트미술가」의 길을 걸었다 . 북한의 현대미술을 주도했던 정관철 정보영 김학원 등 3 명이 그의 동기생이다 . 김흥수씨는 「가난했지만 여유있고 강단있는 선배」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 물감자국으로 얼룩진 옷한벌로 사계절을 지내 학생들이 「우에노의 거지」라고 불렀지만 성격이 쾌활해 주변에 친구가 많았다 . 그는 3 학년때 머리가 길다고 뺨을 때리는 교련교관을 폭행 , 퇴학당했다 . 43 년 귀국한 한씨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부엌에서」가 특선을 차지 , 두각을 나타냈다 . 45 년말 고향으로 돌아가 50 년부터 5 년간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지냈으나 특정인의 초상화나 기록화제작을 거부하다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 대학동기로 미술가협회 위원장인 정관철이 사망한 후에는 반동으로 몰려 원산벽돌공장으로 쫓겨났다 . 그후 복권돼 미술가동맹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북한의 국가미술전람회와 모스크바에서 열린 사회주의국가미술전람회에 출품 , 호평을 받았다 . 85 년에는 일본에서 금강산풍경화 75 점을 전시 ,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 화단의 관심을 끌었다 . 한씨의 작품은 몇점의 정물화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북한지역의 절경과 도시풍경을 담고 있다 . 엄격한 구도위에 붓을 재빨리 움직여가며 날렵...

Chong Seok Jeong 총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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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향토대백과 한상익 남한과 북한이 공동으로 편찬한 백과사전이 있습니다 . [ 조선향토대백과 ] 로 불리는 이 책은 2006 년에 발간 되었는데 북한의 자연 , 인문 , 지리정보를 방대하게 담고 있으며 네이버 및 국가지식포털에서 쉽게 검색해서 열람할 수 있습니다 . 저번에 소개한 북한의 조선력대미술가편람은 온전히 북한의 관점에서 서술한 책이다 보니 다소 읽기 어색한 표현들이 많은 반면에 이 공동 편찬물은 남한사람이 보면 남한 책이고 북한사람이 보면 북한 책일 수도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 일단 조선향토대백과의 한상익 부분을 발췌해 보겠습니다 .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출생하였다 . 19 살에 함흥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구에 내려가 사범학교 강습과 1 년을 다니고 겨울방학기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 일본에서 동경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였으나 군사훈련시간 자기를 모욕한 일본륙군 대좌를 구타한 것으로 체포령이 내려 밀선으로 귀국하였다 . 28 살 되던 해에 서울에서 광복을 맞은 그는 그해 11 월에 고향인 함흥으로 왔으며 조선미술가동맹 함경남도 현역미술가로 첫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 그후 1950 년 4 월부터 5 년 동안 평양미술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 1955 년말부터 조선미술가동맹 함경남도 , 강원도위원회에서 1971 년까지 현역미술가로 창작생활을 하였다 . 1971 년부터 창작실천상 나타난 엄중한 과오로 하여 14 년간 통천군 고지수산사업소와 고산군 광명공예품공장에서 일하면서 창작생활을 하였다 . 1984 년부터 강원도 미술창작사 현역미술가로 있으면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창작활동을 하였다 . 한상익의 창작활동은 1943 년 일본에서 귀국한 때부터 시작되였는데 유화 ‘부엌에서’ ,  ‘추의작’은 1944 년에 열렸던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다 . 특히 전람회에서 특선을 받은 ‘추의작’으로 하여 출세의 길을 걷게 되였다 . 그는 유화에서 독자적인 색채기법련마에 공력을 들였으며 , 그의 창작...

Recent Academic Paper On Han Sang-ik 한상익에 관한 최근 논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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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유화 인식 변화와 한상익(1917-1997)의 형식 문제 The Change of Awareness of Oil Painting in North Korea and the Form of Han Sang-ik (1917-1997) 초록 1940년대 말부터 1990년대까지 이어진 한상익(韓相益, 1917-1997)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는 긍정, 부정의 다양한 평가가 존재했다. 주체미술이 구체화되기 전후 평가 양상의 변화와 더불어 특히 1990년대 이후 한상익 작품에 대한 재평가는 북한 미술 안에서 유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한상익은 해방 이전시기 동경미술학교에서 학습한 것을 바탕으로 인상주의 및 장식적인 색채 점의 효과를 사용한 흔적이 보이며 그는 이후 북한에서 활동하면서 그러한 표현을 발전시켜 나갔다. 1950년 평양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는 특히 변월룡(1916-1990)을 통해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소비에트 인상주의를 학습했다. 1950년대 후반기 북한 미술계에서는 도식주의를 배격하고 예술적 기법의 다양성을 모색하며 풍경화 장르와 작가의 개성, 시적 정신의 발현이 강조되었다. 한상익은 이 시기 자신의 풍경화 작품을 통해 ‘객관적 미와 주관적인 것의 긴밀한 연계’를 표현한 것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물론 그는 복잡한 필치 문제로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의 필치는 이후 1960년대에 사상성 강조 속에서 ‘형식이 내용에 종속’되지 못하는 문제로 인해 ‘주관적’, ‘개념적’, ‘형식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이후 지방 활동에 집중하며 풍경 및 정물 장르를 통해 자신의 필치와 색채를 지속적으로 드러냈다. 그에 대한 재평가는 1991년 김일성에 의해 그의 작품이 ‘조선화’와 같은 ‘우리 식의 유화’라고 평가받게 되면서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1970년대 중반부터 기존의 채색주의 조선화에 몰골법이 도입되면서 ‘빠른 붓질의 함축적 기법’이 강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그러한 정황은 한상익이 여전히 인상주...